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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역사

작성일 : 14.07.12 14:33 | 조회 : 2,071
  1. 글쓴이 : 최고관리자
  2. 1. 역사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양을 기르던 목동들이 끝이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돌멩이를 날리는 민속놀이가 구기로 발전했다는 설과 기원전 네덜란드에서 어린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콜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네덜란드의 콜벤이라는 오늘날의 크리켓이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구기가 14세기경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 전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5세기에는 골프가 지나치게 성행하여 국민의 무도(武道)와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칙령으로 전면금지하거나, 안식일에는 플레이를 금지하였다. 골프는 귀족계급에도 만연되어 왕도 즐겼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는 스포츠로까지 발전되고, 잉글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골프를 ‘Royal and Ancient Game’이라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골프에 관해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1744년 스코틀랜드에서 지금의 에든버러골프인협회의 전신인 신사골프협회가 조직되어 경기를 한 것이 골프클럽과 경기대회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버클럽대회라 하여 실물 크기로 만든 은제 트로피를 만들어 쟁탈전을 벌였다. 이 협회의 의사록에는 13개조로 된 세계 최초의 골프규칙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행 골프규칙의 기반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각지에 골프클럽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선수권대회 형식의 경기도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코스(올드코스)가 있다. 이곳에서 1754년 5월 14일 22명이 모여 ‘더 소사이어티 오브 세인트앤드루스 골퍼즈’를 결성하였으며, 경기규칙의 제정, 핸디캡의 통일, 선수권 대회의 개최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클럽이 영국 골프계를 통할하게 되었다. 한편 여성골프클럽은 1872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직되었다.

    골프가 활발해지자 클럽이나 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직인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골프 기술에도 능했으므로 실기교습에 종사하여 프로페셔널로서 인정받았다. 1860년 처음 제1회 영국 오픈 선수권 대회가 열렸으며, 1885년에는 전영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시작되었다.

    골프는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가 1873년 캐나다에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로열몬트리올골프클럽이 창설되었으며, 1887년 미국 최초의 클럽과 코스를 자랑하는 폭스버그골프클럽이 발족되었다. 그후 20년도 못되는 동안에 황금기를 구가함으로써 영국에 맞먹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의 전신인 미국아마추어골프협회가 창립되었고, 1895년 제1회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해에 전미(US) 오픈선수권대회도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에 있는 3,400개 이상의 골프클럽이 미국골프협회에 가입했으며, 9개의 국내선수권대회와 6개의 국제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미국의 골프는 20세기부터 영국을 능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국력이 피폐해지면서 골프계도 침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에 의해서 미국 골프의 대중화는 눈부시게 진전하여 모든 면에서 영국 등을 압도하였다.

    2. 한국골프

    한국에는 1897년 무렵 함경남도 원산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골프의 시초는 1900년경 함경남도 원산항의 한국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세관 안의 유목산 중턱에 6홀의 골프장을 만들어 경기한 것이 처음이다.

    또 1913년 원산 근처 갈마반도(葛麻半島)의 외인촌(外人村)과 황해도의 구미포(九味浦)에도 외국인 코스가 있었고, 나무울타리로 막아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출입도 금지했기 때문에 규모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골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영친왕(英親王)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이따금 서울에 와서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1921년 조선철도국은 미국인 댄트의 설계로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9홀의 코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효창공원 골프장은 1923년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폐장되고 1924년 이왕가(李王家)의 육림 중심지인 청량리(淸凉里)로 옮겨 18홀이 완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골프사상 처음으로 ‘경성골프구락부(京城俱樂部)’라는 골프클럽이 탄생하였다.

    그 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골프장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같은 영향으로 1937년 9월 전국 골프구락부 협의기관인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열려 한국골프를 세롭게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延德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수업을 받고 3년 만에 일본 오픈경기에 출전하여 8위에 드는 급성장을 보였다.

    194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오픈경기에서 패권을 잡았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프로선수 중에서 한장상(韓長相)이 1972년 일본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우승하였다. 한장상·김승학(金承學) 조는 1971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골프에 출전하여 단체 5위에 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한장상이 한국 오픈경기를 제패하였고, 김승학은 아시아 서킷 1차전인 필리핀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또 1974년 조태운(曺泰雲)이 한국 오픈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프로선수들은 큰 타이틀 5개를 쟁취하는 사상 초유의 ‘황금의 3년’을 맞이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최상호(崔上鎬)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자 프로골퍼로는 구옥희(具玉姬)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고, 원재숙(元載淑)·고우순(高又順) 등도 일본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재일교포 김영창(金榮昌)은 1981년 미국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아마시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 정상에 올랐다.

    1996년에는 46개국이 출전한 제17회 세계아마추어골프팀 선수권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여자 팀이 우승함으로써 세계 최강이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세리가 미국여자프로선수권과 미국여자오픈대회에서 우승했고, 그밖에 김미현·박지은·펄신·송아리 등이 세계프로골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에 세계무대를 꿈꾸며 골프클럽을 잡는 주니어선수들이 급증하고 있어 2000년 현재 국내 프로골퍼의 수효가 남자 약 360명, 여자 140여 명으로 늘어났고 레슨 프로도 15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골프 유관단체는 골프협회를 중심으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한국시니어골프협회·한국대학골프연맹·한국중고골프연맹 등 10개 단체나 결성되어 골프 발전과 골프 대중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전국 15개 시도지부 체육회 산하에도 골프협회가 설립됨에 따라 골프 경기도 전국체육대회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3. 골프사의 명선수들

    골프 역사에서 프로선수 제1호는 영국의 A.로버트슨이다. 그는 세인트앤드루스(Saint Anderws)에서 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경기 기술도 뛰어나서 사상 처음으로 18홀에서 70대의 스코어를 기록하였다. 로버트슨의 후계자 T.모리스는 ‘프로의 아버지’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아들인 영 톰을 명선수로 길러 무패의 전적을 올리게 하였다.

    영국에서의 황금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였고, 그것은 해리 바든(Harry Vardon), J.브레이드, 테일러(H.Tayler) 등 3사람의 힘이 컸다. 이들을 ‘위대한 3거두’로 일컬었으며, 189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4년까지 20년 동안 영국 오픈선수권대회를 거의 장악하였다. 특히, 바든은 근대 골프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고 오버래핑 그립을 창안하여 스윙폼에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20세기에 미국 골프계는 영국에 육박하여, 월터 트래비스가 영국에 원정하여 1904년 영국 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제패하였고, 13년 US오픈선수권대회에서는 무명의 젊은 아마추어인 F.위멧이 영국의 제1인자 바든을 물리쳐 우승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공백기에 미국의 골프계는 현저한 성장을 보였으며, 월터 헤이건(Walter Hagen)이 영국 타이틀을 쟁취함으로써 사실상 영국의 황금시대는 지나고 미국은 제1기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선수가 월터 헤이건, 진 사라젠, 보비 존스(Bobby Jones)의 세 사람이다. 특히 보비 존스는 1930년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마추어이면서도 세계의 메이저 경기, 즉 미국과 영국의 2개 오픈대회와 2개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의 우승을 1년간에 따내는 불멸의 위업 그랜드슬램을 이룩하였다.

    1923∼1930년에도 이들 4대 주요대회에서 13번 패권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잭 니클라우스가 미국 및 영국의 오픈선수권 및 미국의 PGA대회와 마스터스대회 등을 석권하며 총우승 횟수를 앞지른 1973년까지 누구도 필적할 수 없었던 대기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독무대로, 바이런 넬슨(Byron Nelson), 샘 스니드(Samuel Snead), 벤 호건(Ben Hogan)의 세 사람이 이를 뒷받침하였고, 1970년대에는 ‘빅 스리’라는 호칭이 미국의 아놀드 파머(Arnold Palmer),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게리 플레이어(Gary Player) 등에게 주어졌다.

    이들을 추격하는 골퍼로는 리 트레비노, 톰 왓슨(Tom Watson), 조니 밀러 등이 있었고, 1990년대에 두각을 나타낸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그 노먼, 영국의 닉 팔도, 독일의 베른하르트 랑거, 짐바브웨의 닉 프라이스 등이 미국의 기수인 프레드 커플스, 데이비스 러브 3세, 톰 카이트는 물론 일본의 아오키 이사오[靑木功], 오자키 마사시[尾崎將司] 등을 크게 앞질렀다.

    1996년 PGA 신인상을 받은 타이거 우즈(Tiger Woods)는 그뒤 여러 대회를 휘쓸어, 그의 등장은 프로골프사의 대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2000년 8월 17일 미국 켄터키주(Kentucky) 루이빌(Louisville)의 밸핼러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82회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US오픈과 영국 오픈선수권을 차례로 제패하여 최연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다. 그는 한해 동안 벌어지는 4차례 메이저대회 가운데 3개를 석권한 1953년의 벤 호건에 이어 트리플 크라운(3관왕)을 석권한 두번째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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