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장벽, 생각해보면 지금도 피씩 웃음이 나간다.
지난해 여름의 어느 날, 연길에서 일보고 돌아오려고 기차역으로 갔더니 마지막 버스도 이미 떠나버렸다. 기차를 타자면 아직도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지라 내가 어쩔 바를 몰라 한창 서성이고 있는데 한 한족 택시기사가 다가오더니 안도로 돌아가는 길이냐고 묻는 것이였다.
오래동안 택시업을 하면 눈썰미가 백단이라더니 참말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혀 본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안도로 가는 행인인 줄 알았을까? 택시기사는 연길로 왔다가 안도로 돌아가는 길이니 버스표 값만 받겠다는 말에 나는 오늘 참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택시기사를 따라갔다. 빨간 택시문에 씌여진 글을 보니 확실히 안도택시였다. 하지만 날이 이미 어둑스레해진데다가 낯선 한족이라 망설임도 없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이 앞서더니 내 민감도가 점점 심해졌다.
조금 후 안도로 가는 행인이 하나 더 생기자 나는 마음의 탕개를 늦추고 택시를 타기로 작심했다.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 혼자 여자라는 생각을 하자 연기처럼 감도는 불안은 종시 가셔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택시 사건들이 나를 더더욱 무서운 공포로 몰아갔다. 그래서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내가 떠나는 시간과 차 번호까지 알려주었지만 내내 마음이 조여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택시가 한 시간 푼히 달려 안도 시내에 들어서서야 내 마음의 긴장이 드디어 풀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한숨을 호 내쉬는 사이에 택시는 석양홍으로 곧추 달리더니 어느새 우리 집 앞에 와서 칙~ 하고 멈추었다.
"자, 도착했으니 여사님 어서 내리세요."
엉? 유창한 조선말? 그보다도 내가 이 구역에 사는 걸 어떻게 알지? 나는 어리둥절한 채 차에서 내리면서 의문을 가실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사는 걸 어떻게 아세요?"
"한 단원에서 사는데 왜 모르겠어요?"
뭐 한 단원? 세상에 이럴 법도 있단 말인가? 한 이웃도 몰라보고 괜히 마음을 조여 온 나를 생각하니 허구픈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택시기사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한 마음도 잇달아 갈마들었다.
집에 들어선 나는 남편보고 타고 온 택시기사가 우리와 한 단원인데 괜히 걱정했다고 했더니 남편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내 뒤를 따라 들려오는 계단을 밟는 소리와 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니 그 택시기사는 바로 우리 위층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경제시대에 수 많은 단층 집들이 다투어 보기 좋은 아파트로 바뀌였지만 울바자 굽으로 바가지에 음식을 담은 채로 넘겨주고 넘겨받던 인정들은 어디론가 감감 사라져 그립기만 하다. 이웃 간에도 언제 이사를 가고 언제 이사를 오며 또 이래 위층들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 못할 장벽들만 나날이 두터워진다.
문뜩 내가 살던 시교의 5호 동네가 그리워지면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 시야를 메워간다.
2003년 나는 파가이주로 시내와 좀 떨어진 한 교외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큰길 옆에 오붓이 자리 잡은 작은 동네는 다섯 호의 단층집들로 이뤄졌는데 모두 조선족들이였다.
앞줄에 두 집 뒤줄에 세집이였는데 출입문이 서로 마주하다 보니 공동 마당을 사용해야 했다.
내가 그 동네로 이사를 가자 일부 친구들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집은 좋은데 공동용 마당이여서 불편할 것 같아.”
“아니, 살아보니 생각보다 괜찮아.”
나의 대답에 친구들은 그냥 반기였다.
“그래도 단독 울안이 좋지 뭐.”
나도 물론 단독 울안을 좋아했다. 조용하고 편리한 오직 나만의 공간… 하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이 5호 동네를 선택하게 되였던 것이다.
사실 갓 이사를 갔을 때는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해가 지면 대문부터 꽁꽁 잠그는 습관에서도 있겠지만 친구들이 많은 데다가 홀로 사는 여자의 집에 이성 친구가 드나들어도 온 동네에서 손금보듯 알게 될 것이니 말밥에 오를 것 같은 부질없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였다. 나는 그때 한참 문학에 열성을 보일 때라 문학도 이성 친구들이 자주 드나들었지만 동네에서는 그 누구도 이상한 눈길로 나를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만 나서면 서로 따뜻이 인사를 나누었고 간혹 집을 비워도 서로 봐두었으며 마당에 쓰레기 하나 있을세라 다투어 가며 청소를 하기에 자연히 마음의 걱정이 사라졌고 오가는 정이 생기게 되였다. 이뿐이 아니다. 때는 한창 여름이라 집안이 갑갑해 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쪽걸상을 들고나와 서로 마주 앉아 맛 나는 과일이나 고구마 같은 것도 나누어 먹으면서 몇 시간씩 웃음 꽃을 피우다 보니 점점 친숙해져서 나중에는 서로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다.
처음에는 생소한 곳에 이사를 가서 익숙해지자면 일정한 시간이 걸릴거라고 생각하였는데 공동마당 덕분으로 나는 불과 얼마 안 걸려서 이웃들과 모두 익숙해졌다.
내가 혹시 책을 보느라 집에 들어박혀 있으면 앞집 아줌마가 우리 집에 대고 말을 걸어온다.
“어서 나와요. 우리 다 모였어요.”
그러면 나도 보던 책도 덮어버리고 부랴부랴 나간다.
“어서 여기 와서 앉아요. 자주 만나야 정이 들지요.”
옆집 아줌마도 동을 달아간다. 그렇게 모여 한참씩 이야기를 주고받노라면 어느새 한 가족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점차 책에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에 빠져들군 하였다.
여기에 우스운 이야기 하나 있다. 내가 이사해서 얼마 안 되어 외지에 있는 내 남동생이 처음으로 놀러오게 되였다.
그날 내가 잠간 일 보러 갔다가 남동생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오는 동안 남동생은 밖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창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이때 앞집 아줌마가 밖에 나오더니 말에 날을 세웠다.
“대체 누구길래 함부로 남의 집안을 훔쳐보는거요? 이 동네에서는 도적질 같은 걸 꿈도 꾸지 마세요.”
이에 급해 난 남동생이 바로 해석을 하였다.
“오해 마십시요. 저의 누님집입니다.”
“오. 그런걸 난 또 하하… 참 미안하게 됐어요”
아줌마가 게면쩍게 웃으며 사과를 하더라고 하였다.
“누님 이사 잘 왔소. 누님 혼자 사는 걸 생각하면 늘 걱정이였는데 인젠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겠소.”
나도 남동생도 마주 보며 즐겁게 웃어버렸다.
어느 한번 비가 오던 날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오게 되었다. 그날 진종일 내린 비로 하여 문 앞에 새로 판 하수도 자리가 푹 꺼져 들어간 걸 낮에 보았는지라 나는 불편한 다리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그 구덩이 위에 넓고도 긴 널판자가 놓여 있을 줄이야.
(누가 놓았을까?)
나는 그 널판자를 밟고 무사히 구덩이를 건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튿날에 알게 된 일인데 앞집 아저씨가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저녁에 구덩이를 지나다가 변을 당할가 봐 비를 맞으며 널판자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그 5호 동네의 이야기들은 늘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 속에 묻히게 한다.
만약 제가끔 담장을 막고 살았더라면 어찌 그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느낄 수가 있었으랴. 비록 호화로운 아파트도 아니고 눈부신 야경이 흐르는 아름다운 시가지도 아니었지만 날마다 만끽 할 수 있는 감미롭고 꽃향기 같은 아름다운 인정으로 고달픈 삶 속에서 생겨버린 내 마음의 오염도 날마다 세척되어 갔다.
2006년 나는 정든 5호 동네를 떠나 석양홍구역 아파트에 이사를 오게 되였다.
아파트에서의 삶은 한결 여유롭고 편했지만 이웃 간에 오가는 정이 바싹 말라버린 듯한 따분한 느낌으로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해 남을 어쩔 수 없었다. 마실 같은 건 아예 다닐 수가 없는 건 물론이고 한 아파트에서 수년간 살아도 성도 이름도 지어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를 외국에 보낸 한 50대 남자가 어느 아파트에서 살다가 뇌출혈로 혼자 사망했는데 사망한지 일주일 후에야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이웃과 서로 거래하면서 살았더라면 혹 이런 참혹한 일은 피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내가 살던 5호 동네의 그 아름답던 인정의 씨앗들을 이곳에는 뿌릴 수 없을까?
어느 한 아파트에서는 한 단원의 사람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진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굳이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찾아 서로 연락해가며 바쁜 시간에 모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쉽게 만날 수 있고 서로 인정이 그립고 필요한 이웃끼리 마음을 열어간다면 오죽 좋을까?!
AA제로 밥을 사고 술잔도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말라가는 인정의 틈서리들을 메워간다면 비록 처음에는 얼마간 서먹감도 있겠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잡초 속에 길이 생기듯 정이 오가고 믿음이 생기면서 가족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서로가 주고받는 인사로 마음을 덮히고 힘든 삶에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준다면 두터워진 장벽에도 인정의 꽃이 피어날 것이라는 바람도 가져본다.
시골 마을의 장벽들은 눈에 보이지만 아파트단지의 장벽들은 마음에서 보인다. 해와 달이 수없이 바뀌는 세월 속에 날마다 바뀌어 가는 무수한 변화들은 눈앞에 확연하지만 인정의 색다른 변화에는 아직도 가물이 완연하다. 함께 하는 우리 삶에도 언젠가는 물기가 함초롬한 인정이 살며시 다가오리라는 간절한 바람을 버릴 수가 없다.
/박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