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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항일련군 제3군의 조선인장령들

작성일 : 15.10.11 15:15 | 조회 : 5,933
  1. 글쓴이 : 최고관리자
  2. 중국 동북항일련군의 역사는 중국 항일전쟁 역사의 빛나는 한 페지일 뿐 만아니라 우리민족의 민족해방력사에서도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한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동북항일련군에서 중국인민들과 어깨 곁고 함께 싸웠으며 수많은 생명을 바쳐 조국의 해방을 맞아왔기 때문이다. 


    한중방송 사진.jpg


    동북항일련군은 구경 어떤 부대인가?

     

    “9.18”사변이후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은 일본침략자들에게 투항하지 않고 항일을 견지하는 동북항일의용군, 원부분동북군, 농민폭동군, 삼림대 등 일체 단결할 수 있는 역량을 단결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이루었는바 이들은 14년간의 피어린 항쟁으로 수십만 명의 일본침략군을 견제하였으며 10여만차의 전투를 벌려 일본관동군 18만 명(쏘련의 통계는 8만명)을 섬멸함으로써 전국의 항일전쟁과 세계반파쇼전쟁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동북항일련군에서 우리 조선인항일투사들의 지위와 작용은 어떠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동북항일련군은 중한(조)항일련군이다.아직 동북항일련군내의 조선인수에 대해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동만(연변지구)에서는 대다수가 조선인들이였으며 남만과 북만에서도 상당한 비례를 차지하였다. 원 동북항일련군 3군의 리민의 회억에 의하면 항일련군내의 조선인수는 1만5000명가량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인들이 반수를 차지하였다는 말이다. 그중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내부분쟁으로 국제공산당에 의해 해산되면서 공산국제의 “일국일당”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명의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그들은 항일련군에서도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게 된다.

     

    오늘 여기에서는 주로 남양(양정우)북조(조상지)로 이름 높은 북만항일련군 제3군 즉 일본침략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조상지부대에서의 조선인 장령들의 발자취를 조명해 보려한다.

     

    조상지와 조선인항일투사들과의 인연

     

    조상지가 1930년4월 두 번째로 체포되어 9.18사변직후까지 봉천제1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기간 리복림, 김책, 허형식 (리희산) 등 조선인들도 함께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리복림과 김책은 조기의 조선공산당원들로서 1930년6월에 조선공산당이 해산되면서 통일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였다. 허형식은 당시 김책과 한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조상지는 미결감방에서 강도범들속의 “깡톨(우두머리)”로 제왕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9.18”사변직후 석방되였던 조상지는 이듬해 1932년 설을 앞두고 하얼빈으로 왔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석방된 리복림, 김책 그리고 허형식 등은 육속 북만지방에 파견되였다. 리복림은 만주성위의 순시원신분으로 주하(현상지시)지방에 파견되였고 김책과 허형식은 빈현 일대에서 반일회와 무장대오를 조직하였다.

     

    조상지는 처음에 파언현의 장갑주강북독립사에 파견되어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파언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는 등 전과도 올렸지만 만주성위의 좌적 노선으로 1933년3월에 강북독립사를 모조리 잃고 당적까지 취소당하였다.

     

    쫓겨난 조상지는 한 고향(료녕성 조양현)사람인 손조양이 이끄는 항일의용군부대‘조양대’를 찾아가 마부로 종군하였다. 그는 조양대가 일본군의 포위에 들어 부대가 전멸될 위기에서 천재적인 군사지휘재능을 발휘해 조양대를 구하고 사령원 손조양에 의해 참모장으로 발탁된다.

     

    이때 이‘조양대’에는 주하현위에서 이들을 쟁취하기 위해 잠입한 리복림과 리계동이란 조선인이 있었다. 이들의 극적인 상봉은 이들이 부득불(일본특무들의 리간) 조양대를 탈출하여 주하항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조상지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양대를 탈출하였는데 그중 4명이 조선인이였다. 그들로는 리복림, 리계동, 리근식, 강희선이다. 리근식은 기관총사수로서 조상지가 리계동, 리복림의 추천으로 조양대에서 경위반장으로 데리고 있던 사이였으며 그로부터 리근식이 희생될 때까지 불과 10개월도 안 되는 기간 거의 조상지의 그림자가 되였고 주하유격대가 창건된 후에는 첫 기병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33년10월10일, 조상지가 대장을 담임한 주하동북반일유격대가 정식 성립되였다. 대원은 총 14명, 리복림이 정치위원을 겸직(당시 그는 주하현위 조직부장)하고 리계동이 경제부장(후근)을 담임했다.

     

    항일영웅 조상지의 파란많은항일무장투쟁은 이렇게 첫 출발을 시작하게 된다.

     

    연합전선과 허형식의 입대

     

    주하유격대가 성립된 후 그들은 인츰 삼고류의 토호 왕복산의 지주무장 대패대를 치고 근처의 동서오갑, 장가만 등지의 경찰서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모두 성공하였다. 또 원 조양대의 류해도, 리춘산 등이 30여명 대원들을 데리고 찾아와 인원수는 40여명으로 불었고 산하에 1개 대대와 3개 중대를 두었다.

     

    중동철로남부지대의 첫 유격근거지가 개척되자 주하중심현위는 인차 중동철로북부지대를 개척할 것을 결정지었고 김책(주하현위비서장)을 유격대에 파견하였다. 김책은 이번 기회를 타서 중동로 북부지대에 본거지들을 잡고 있는 각지의 항일의용군과 삼림대 그리고 일부 지방무장들과 연합전선을 펼 것을 권고하였다.

     

    조상지는 이 건의를 받아드렸다. 많은 의용군과 삼림대들이 호응하였지만 일부는 유격대가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미심해하였으며 지켜보려는 치들도 적지 않았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하여 리복림과 김책의 지지하에 조상지는 유격대의 힘으로 먼저 본때 있는 전투를 하여 흑룡궁에 틀고 앉은 황포의 민단무장부터 없애여 다른 한간부대들을 징계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즉시로 전투를 조직하여 오상현 경내에서 시끄럽게 굴던 지주무장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렸다…그네들은 다시 조상지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때 흑룡궁에는 김책의 파견을 받고 주하현위 특파원 신분으로 잠복한 허형식(당시 리희산)이란 조선인이 있었다. 그해 24살인 리희산은 늘 농민들과 함께 밭일을 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집일을 도와 이영도 잇고 잡일도 도우며 군중사업을 능란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때로는 일부 청년들과 결의형제를 맺는 형식으로 그들을 동원하여 항일활동에 참가시키기도 했다.

     

     

    이번 허형식의 흑룡궁에서의 출현은 흑룡궁당지부서기 왕홍생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자는 부녀반일회의 회원들속에서 젊고 예쁜 여자들과 추문이 있었는가 하면 지방유격대에는 자기의 친척 장유재라는 자를 대장으로 앉혀두고 있었다.

     

    또 그는 황포의 친척이기도 하였다. 왕가는 차라리 10여자루의 총을 소유하고 있는 장유재의 지방유격대를 이끌고 적들에게 투항하려고 하였으며 반일녀회원들의 재봉침을 몰수하였다. 소식을 접한 허형식은 그날 밤으로 리복림을 찾아왔고 리복림은 그를 조상지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조상지는 그 이튿날로 왕홍생과 장유재를 잡아 처단하였고 그 길로 곧 흑룡궁전투를 진행하였는바 이 전투에서 비록 황포는 도주하였으나 유격대는 크게 위명을 떨쳤다.

     

    주위 20여 갈래의 항일의용군과 삼림대들이 유격대에 합류했고 1934년 6월에 이르러 유격대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哈东支队)로 재편성된다. 합동지대는 450여명으로 불었다.

     

    주하현위 위원이었던 허형식은 흑룡궁전투후 곧 합동지대에 전근하였고 그 후 희생될 때까지 장장 10여년의 인생을 줄곧 조상지와 함께 보내게 되며 처음엔 합동지대 제3대대의 정치지도원이 되였다가 인차 제1대대의 대대장으로 발탁된다.

     

    리계동의 희생과 허형식의 부상(浮上)

     

    당시 합동지대 산하의 3개 총대대 영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였다.

     

    제1총대는 조상지의 유격대였다. 제2총대는 황포의 민단(흑룡궁전투직후 넘어왔음), 제3총대는 원래의 흑룡궁위만자위단을 기초로 편성되였으니 총대장은 조덕이였다.

     

    이해 여름(1934년7월) 합동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삼차하일대의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빈현 서쪽 만가점에서 싸울 때다. 여기서 처음 연합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포가 수하 제2총대를 거느리고 전원이 도주한 것이였다. 얼마 후에는 또 의용군 구강(九江)부대와의 무장충돌이 발생하였다.

     

    구강부대의 우두머리는 우구강으로 일찍 조상지가 삼차하에서 적들의 포위에 들었을 때 달려와서 도운바 있는 말하자면 조상지에게는 은혜로운 자였다. 그러나 우구강도 역시 철두철미한 비적이었으니 조상지의 영도를 받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특히 주하유격대는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대오였고 공산당은 연합군에 든 각 부대들이 함부로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우구강은 황포 등 부대들이 이미 조상지부대를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작심하고 부대를 이끌고 빈현 남쪽의 유격구로 밀고 들어가 백성들의 물건을 앗아내고 새롭게 합동지대에 편성되어 들어온 한 삼림대의 무장까지도 모조리 빼앗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상지는 대경실색하였다.

     

    만가점전투에서 크게 이긴 조상지는 그 기세로 당장 구강부대를 다스릴 잡도리였다. 그러나 리복림과 리조린(당시 장수전이라 불렀다) 등이 이를 말렸다. 당위에서는 토의를 거쳐 우선 구강부대를 도와 그들에게 량초를 해결해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리계동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는 어쩐지 우구강을 믿을 수 없다. 우구강도 그렇고 연합군에 든 기타의 부대들에 대해서도 너무 희망을 걸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은 필경 비적들이니 악습을 고치기 퍽 힘들 것이니 항상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리계동은 조상지보다 12살 많았다. 최용건, 주보중과 함께 운남강무당 보병과 제17기를 나왔다. 그들 두 사람은 개인적 정분으로 볼 때 리계동은 조상지에 있어서 너무나도 훌륭한 형장이였다. 합동지대가 창건된 뒤에도 리계동은 실상 조상지의 가장 믿는 뒤심이였다. 그리고 리계동은 전체 연합군부대의 살림군이기도 하였다. 경제부장이였으므로 그는 군수물자 공급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조상지가 어느 전투에서 로획한 말 한필을 리계동에게 선물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자기가 타지 않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데 썼다. 그 자신은 언제나 걸어 다니군 했다.

     

    이어 리계동은 그곳에서 멀지않은 3총대의 주둔지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길이 그들의 영원한 이별길이 되고 말았다. 평소에 리계동이 데리고 다니던 후근부의 소분대속에 일본군 하얼빈특무기관에서 밀파한 간첩 주광아가 끼여 있었던 것이다.

     

    리계동의 뒤를 이어 합동지대로 내려온 사람은 바로 김책이였다. 김책은 리계동의 경제부장을 겸직하였다.

     

    1935년 1월 28일, 주하유격대가 제일 처음 개척했던 삼고류 유격근거지에서는 일대 경사가 벌어졌다. 이날 합동지대는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재편성된 것이였다. 군장 겸 제1사 사장에는 여전히 조상지, 현위조직부장 리복림은 3군의 집법처장을 맡았다. 이때 허형식이 급격히 부상되였다. 그는 제3군 제1사의 정치부주임과 제2퇀 퇀장을 겸임하게 된다.

     

    “허형식이 온다!”

     

    이미 수차의 토벌에서 거듭 실패를 반복하였던 일위군은 조상지를 상대로 많은 교훈들을 섭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로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여 목단강중하류지구에서 조상지부대를 에워싸는 한편 잠시 동안 그가 없는 하얼빈동부지대의 여섯 개 현성에서 유격구와 가까운 곳들에‘집단부락’을 만들고‘무인구’를 설치함으로써 유격구의 군중조직들을 모조리 파괴하여 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조상지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935년 6월 초순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때 합동유격근거지의 군중조직들이 적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조상지와 김책, 리조린 등은 후회막급이였다. 당초에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목단강일대로 남하한 것부터가 엄중한 실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기는커녕 원래 있던 근거지마저 잃어버리고 만 것이였다.

     

    그러나 조상지는 근거지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인민들의 참상이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듯 하여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는 리조린의 의견을 물었다. 이때 리조린이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만약 합동으로 돌아갔다가 거기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면 다시 하강으로 돌아올 겁니까?” 사실 김책이나 리복림 같은 사람들도 모두 리조린과는 동감이였다.

     

    얼마 전에 3군 제2퇀의 퇀장으로 임명된 허형식이 참다못해 나섰다.” 우리는 단지 발을 붙이기 위해서 합동지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토벌을 짓부시기 위해서라도 합동지방으로 달려가야 하며 그곳에서 우리 당, 우리군의 정치적 영향을 가일층 확대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도 우리 부대가 얼마쯤 남아 계속투쟁을 견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허형식의 2퇀은 3군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부대의 하나였다. 허형식의 지지를 얻은 조상지는 퍼그나 고무되였다. 그는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을 내렸다. 그 자신이 허형식의 제2퇀과 3퇀을 거느리고 합동지대로 돌아가고 리조린과 류해도가 제1퇀을 거느리고 계속 하강지구에 남기로 하였다.

     

    주하일대로 돌아온 조상지와 허형식은 생각보다 몇 곱절 참혹한 형세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때 허형식의 군사적재능이 높이 발휘되였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한 지휘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계략도 뛰어나서 종래로 밑지는 전투를 치르는 일이 없었다.

     

    그때까지 3군에는 아직 참모장이 없었지만 조상지는 군사문제에 들어가서 허형식의 견해를 많이 청취하군 하였다. 그가 거느린 2퇀은 당시 도북지구에 산재되여 있던 10여개의 의용군부대와 연합전선을 무었다. 연합군은 선후로 연수현 류수하자 거점을 공략하였고 주하현의 대, 소량 주하지구 적군의 군용농장을 짓부셨던 것이다. 그 후에는 또 빈현 경내의 고려모정자를 공략하는데도 성공하여 한창 창궐하던 적들의 기염을 꺾어 놓을 수가 있었다.

     

    이 기간에 허형식은 의용군부대의 수령들과 수차 상론하고 군법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서 추호의 사정이라는 것을 봐 줄줄 몰랐다. 위반자에 대해서 어떻게나 날카로웠던지 연합군부대의 전체 사병들이 뒤에서 그를 가리켜 제2의 조상지라고 부를 지경이였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차츰 위명을 날리기 시작하여 30년대 후반기에 항간에서는 지어 아이가 울어도 “허형식이 온다!”는 소리로써 우는 아이들을 달래군 했다고 한다.

     

    정치 간부로서 그리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당과 군대 내에서 그 성망이 높아짐에 따라 이듬해(1936년 9월)에는 27살에 나는 허형식이 일약 북만임시성위원회의 위원으로, 그리고 3군 군장(조상지가 쏘련에서 감금되여 있은 기간)과 3로군 총참모장으로까지 당선되는 것이다.

     

    ‘반경향투쟁’에서의 김책과 북만성위서기로의 부상

     

    1935년 말, 3군 군장 조상지는 제4군에서 모스크바 중공대표단의‘6.3지시’ 편지를 보았다. 그는 편지에서 제출한 ‘역량을 축적하여 큰 사변을 기다려야 한다.’는 등 방침에 대해 크게 불만했다.

     

    1936년 9월 18일, 조상지가 소집한 주하, 탕원중심현위와 3군, 6군 연석회에서는 모스크바 중공대표단이 제출한 투쟁책략에 대해 부정했다. 김책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북만 새로운 성위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37년 10월, 역시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김책은 또 중공북만림시성위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북만 당내에 두 가지 부동한 적대투쟁책략의 모순이 격화되고 있을 때, 멀리 하강에 있은 김책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북만성위에서의 지위가 직선상승 했다.

     

    1938년, 쏘련에 가서 지원을 청구하던 조상지가 쏘련군에 의해 감금되였다. 북만임시성위 서기 장란생, 3군 정치부 주임 리조린을 대표로 하는 모스크바 중공대표단(단장에 왕명, 부단장에 강생)의 지시를 따르는 파들은 조상지가‘좌경폐문주의 착오’와 ‘레닌주의를 반대하고 당을 반대하고 조직을 반대하고 중앙을 반대하는 착오’를 범했다고 질책하면서 동시에 조상지의 군장직무와‘좌경폐문주의 옹호자’, 하강 당위서기 황성식(조선인) 등 고위급간부들의 직무를 해제해 버렸다. 6월, 김책이 동북항일련군 제3군 정치부 주임으로 승급되였다.

     

    적들의 봉쇄로 김책은 1938년 6월에야 상술한‘반좌경투쟁’ 문건들을 보게 되였다. 김책은 조상지가 노골적으로‘중앙로선’을 반대하는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당내투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조린 등 사람들이 조상지를 전부 부정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면 북만당과 군대 내에 크나큰 사상혼란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정직한 김책은 자신이 철직당하고 비판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만성위, 3, 6군 당위, 하강특위와 하동특위에 자기의 의견서를 써 올렸다.

     

    그는 리조린이 조상지가 떠나간 다음에야 비판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어도 기회주의 투쟁방법)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으며 성위에서는 조상지의 좌경폐문주의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당내의 각종 그릇된 경향(리조린의 조화경향)을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위의 매개 사람(장란생과 리조린을 포함)들이 조상지의‘착오’에 모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항일전쟁승리기념관 앞에 세워진 높이 14미터의 국기게양대는 중국인민 항전14년을 의미한다.이로써 반세기넘어 이어져오고 있던 현안(잃어졌던 동북항일련군 6년력사)이 풀리기 시작했다. /자료사진

     

    김책의 의견서는 북만당내 형세가 진일보로 악화되고 군대가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1939년 5월, 새로 성립된 북만성위에서는 장란생과 리조린을 처분했고 일년 남짓이 끌어오던‘반좌경’투쟁을 종말 지었다. 김책은 북만성위서기로 당선되여 북만지구의 군대와 지방 당위 사업을 전면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뒷이야기이지만 김책은1941년 7월 10일, 쏘련 원동지구야영당조직과 주보중의 제의에 근거하여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정위를 담임했으며 항일련군 장령들 중 제일 마지막(1944년1월)으로 쏘련에 철퇴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성림 기자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5-10-17 11:18:39 주요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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