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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항일의사, 테러리스트인가?

작성일 : 15.10.21 07:33 | 조회 : 6,125
  1. 글쓴이 : 최고관리자
  2. 금년은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한국 광복 70주년, 세계 반파쇼전쟁 승리70주년이다. 이와 같은 경사를 앞두고 오늘 이 자리에서 흑룡강지역 우리민족의 항일투쟁 발자취를 조명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할빈을 중심으로 한 흑룡강성은 조선민족의 항일투쟁 전쟁터였다。수많은 한국 독립운동 계렬의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 계렬의 항일투사들이 이 땅에 피를 흘렸고 목숨을 바쳤다. 특히 할빈은 안중근의사 의거 현장이다.

     

    191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할빈 역두에서 한국 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한국 침략의 원흉,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안중근은 항일의사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쟁론은 계속되고 있다.

     

    ( 1 )

      

    2014년1월19일 할빈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개관한 이후 일본 내각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 ( 菅义伟 )는 1월20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안중근은 ‘테러리스트(恐怖分子) ’라면서 할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에 대하여 중국과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당일 중국정부 훙레이(洪磊) 외교부 대변인은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의사이며 중국인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밝히고 “항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한국외교부 대변인은 논평을 발표하여 스가 요시히데의 ‘몰상식하고 몰역사적인’ 언론을 질책했다.

     

    새누리당 사무총장 홍문종은 “만약 안중근의사를 테러리스트라 한다면 주변국가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과 약탈을 강행한 일본은 테러국가일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로동신문’도 1월 26일 논평을 발표하여 일본이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무함한 것은 역사의 정의를 전복시키는 ‘망동’이라 규탄했다.

     

    안중근의사는 과연 테러리스트인가? 하는 문제는 외교상에서 쟁론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상에서도 광범하고도 격렬한 쟁론을 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하여 필자는 관계되는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많은 문장들은 부동한 각도에서 안중근의사 의거의 정당성 정의성을 논술하여 많은 교육을 받았다.

     

    이와 반면에 적지 않는 문장들은 역사적 사실을 떠나 ‘테러리스트’ 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언론을 제시한다.

     

    2014년 4월18일 일본에서 온 일중친선대표단 일행 3명을 접대했다. 그들은 할빈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참관한 후 그중NPD일중청년교류촉진회 부리사장 다까시마(高岛)교수는 “이와 같은 역사를 우리들은 모두 모르고 있다.

     

    지금 일본사람들 90%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일본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 교수 김문학은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란 문장에서 “안중근은 한국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항일투사’이고 ‘민족영웅’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틀림없는 테러리스트이다. 당시의 국제 법에 비추어 보아도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다 ”고 했다.

     

    2014년 1월 27일 상해 ‘외탄화보’에는 홍콩의 저명한 언론인 여구로미(闾丘露薇)의 문장 ‘그들은 어째서’를 실었다. 이 문장에서 ‘암살, 작탄습격은 모두 테러리스트에 속한다. 이중표준은 있을 수 없다. 하소연 하거나 출발점이 고상하다하여 이런 행위가 합리하고 합법적으로 변할 수 없다. 안중근은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테러리스트이다”고 역설했다.

     

    한국 연세대학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는 2006년 한 좌담회에서 “극우는 테러하는 안중근 같은 사람이지 난 연필 하나 못 던진다.”라고 했다. 한국의 언론인이며 문학가인 고종석의 문장 ‘테러리스트 안중근을 위하여’에는 “민족의 자유를 위해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한 테러리스트이기도 했다.” 라 썼고 계속하여 안중근의사는 “아시아 평화를 이루기 위한 방책을 구상하던 지식인 테러리스트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인터넷 ‘천애논단’ 2014년 1월22일에 입력한 작자 하눌새는 “중국으로 보면 안중근은 어떤 정의로 해석하든 모두 테러리스트이다”라 하고 “이등박문은 피살 당시 이미 수상을 그만 두어 법률적으로 보면 평민이다.”라고 했으며 “안중근은 빈·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이다 ”라고 했다. 심지어 “안중근은 테러인데 무얼 그리 연구할게 있는가” 고 나에게 직접 질문을 들이대는 사람도 있다.

     

    ( 2 )

     

    무엇이 테러리스트인가? 매개 나라마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의(定义)가 같지 않다. 자료에 의하면 세계상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의가 1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각국의 표준이 다르기 때문에 집행상에 서로 모순이 생긴다.

     

    예를 들면 남아프리카 전 흑인대통령 만텔라는 민족해방 사업에 투신하여 백인정부의 종족기시정책을 반대하고 민족자유평등을 쟁취하는 투쟁을 벌려 백인정부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27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하지만 국제노벨평화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다면 테러리스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2005년 7월 25일 유엔 사무총장 안난은 유엔총부에서 이루어진 기자 회견에서 각국에서는 테러리스트 정의에 대한 쟁론을 결속 지을 것을 호소하면서 ‘평민이나 비전투인원에게 사망 혹은 엄중한 신체 상해를 조성하는 행위는 모두 테러리스트의 행위다’라고 간단명료하게 테러리스트의 정의를 내렸다.

     

    이로보아 ‘비전투인원을 해치는 것’이나 ‘무고한 평민을 살해하는 것’이라야만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법은 ‘조국의 독립을 보위하고 국가의 생존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행한 자위전쟁은 정당한 행위에 속한다.’고 했다.

     

    이로보아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진행되는 모든 항쟁행위는 정당한, 정의적인 행위이다. 문제는 침략에 반항하는 정의성과 테러리스트 적 활동을 구별하여야 한다. 물론 모든 테러리스트 활동을 반대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공동적인 준칙으로 되고 있다.

     

    ( 3 ) 

     

    안중근의 의거는 테러리스트인가? 아니다! 역사사건의 평가는 단순한 어휘개념에 맞출 것이 아니라 인류정의의 표준에서 평가 되여야 한다. 안중근의 의거는 평민을 살해하는 테러습격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보귀한 생명을 바친 정의적인 거동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안중근의 의거가 테러리스트가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안중근이 격사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정책을 추진한 괴수로서 직접 한국을 침략한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정계의 중심인물로서 선후 4차례나 일본정부의 내각수상을 담임했던 일본의 침략정책의 결책자요 집행자였다.

     

    1905년 11월 7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강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서울에 일본 통감부를 설치했다. 1906년 이토는 대한제국의 제1임 통감을 담임했다. 1907년 7월 24일 이토는 또 강박적으로 ‘정미7조약’을 조인하고 강제적으로 한국군대를 해산시켰다.

     

    1909년 4월 이토는 일본정부에 한국을 병합할 계획을 제출했고 7월에 일본내각에서 한국을 합병할 결의를 통과했다. 이와 같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동 하에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안중근은 할빈에서 진행된 제1차 심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행 15조를 열거하여 이토가 한국침략의 제1호 침략자, 제1호 큰 죄인, 제1호 악독한 살인범이란 것을 증명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결책에 의하여 1894년에 중일 갑오전쟁을 발동하여 ‘마관조약’을 맺고 중국의 대만과 팽호열도를 약탈했다. 1904년에는 일러전쟁을 발동하여 ‘포스모스조약’을 맺고 대련, 려순을 점령하였고 려순과 장춘간의 동청철도를 점령하였고 러시아의 남 사할린을 점령했다.

     

    이와 같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한 원흉일 뿐만 아니라 중국 침략의 괴수이며 아시아평화의 파괴자이다. 이 역사는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이기에 이를 말살할 수 없고 전복 시킬 수도 없다. 안중근이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격사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하여 총을 쏜 것으로 세계 반파쇼투쟁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겨 놓았다. 안중근의사는 앞으로도 국제노별평화상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2.

     

    안중근이 의거 당시 대한제국 국민과 일본 침략자 사이에는 전쟁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군대를 강제적으로 해산 시킨 후 분개한 한국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항쟁하였다. 이어 전국적인 침략을 반대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운동이 일어나 자위전쟁을 진행하여 전국 각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 아오모리대학 이치가와 마사키 교수가 집필한 ‘안중근과 일한관계’란 책에는 한국 의병 총수는 16만 3680명이나 되었고 일본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와 의병 지간에 발생한 전투는 2907번이였다고 하였다. 일본 동경변호사협회 부회장 가노다꾸미 박사의 저서 ‘안중근 무죄론’에는 더 구체적인 정황을 밝혔다. 즉 1907년8월부터 12월까지 전투 차수는 323차, 참전한 의병은4만4116명, 1908년 전투 차수는 1542차, 참전한 의병은 6만9832명, 1909년 전투 차수는 898차, 참전한 의병은 2만5763명. 1910년 전투차수는 147차, 참전한 의병은 1만891명이라고 하였다.

     

    안중근 자신도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참모중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7월 안중근은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첫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제2차로 국내에 진군하여 경흥군 신아산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또 승리하였고 일본 군인을 4명 포로하였다.

     

    안중근은 국제공법에 의해 일군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제3차로 회령군 인근 영산에서 일군과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데 적과의 역량 차이가 너무도 커서 패전하고 연추로 돌아왔다. 그는 또 다시 의병을 조직할 가능성이 없는 실정에서 투쟁방식을 바꾸어 11명 동지를 소집하여 단지동맹을 맺고 국권회복에 생명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한국 의병투쟁의 연속이다. 한국 의병중장으로서 수중에 돈이 없고 총도 없으며 군인도 없는 정황에서 거행한 반일투쟁의 한 가지 수단이다.

     

    안중근의사는 일본법정 제3회 공판에서 “이번 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한국의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보통의 피고인이 아니고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이번 거사는 의병의 군사행동임을 표명했다.

     

    자위전쟁 중에서 참모중장으로서의 안중근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어 그 어떠한 형식과 수단이든지 적군을 쏘아 죽일 권리가 있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어떤 수단을 쓰든 모두 정의적인 것이다. 오늘날 안중근의 의거를 평가하는데 있어 당시 한일 지간에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을 회피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일본은 한국의 의병을 ‘폭도’라 하고, 일군과 의병의 전쟁을 ‘충돌’이라 하면서 한국의 독립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3.

     

    이토 히로부미가 할빈에 온 목적은 한개 평민이 여행하려 온 것이 아니라 만주를 침략하러 온 것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관직은 일본추밀원의장이다. 일본추밀원은 대신들과 고관들로 조성된 천황의 최고 자문기구이다. 일본은 만주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토 공을 할빈에 파견한 것이다. 그는 일본정부의 전권대표로서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푸체프와 담판하러 왔다. 사전에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 정부가 외교도경을 거처 마련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할빈에 오게 된 것은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에 있어서의 이익을 분할하려 했다. 일본의 ‘문사신보(门司新报)’ 1909년 10월9일 보도에는 이토가 출반하기 전 10월 2일에 천황을 회견하였고 가스라 수상을 만났다.

     

    가스라는 이토에게 “일본 외교의 기초가 한국 본위였는데 이제부터는 만주 본위로 할 생각이다. 그래서 일본의 만주정책을 확립하도록 해달라.”고 이토 공에게 요구했다. 당시 일본은 남만주를 세력범위에 넣었고 러시아는 북만주의 우세를 차지하였다. 각자가 모두 자기의 세력범위를 확장하려 했다.

     

    둘째로 일본은 동청철도를 구매하려 했다. 일본의 오사카신문은 ‘이토공의 이번 만주행은 공무로 가는 것이지 개인 려행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미국의 하리 문회사에 매도할 의도가 있음을 알고 일본이 구매 하려고 비밀 교섭을 하기위하여 이토를 파견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할빈 도태(道台) 시조기의 회억록에도 ‘일본은 동청철도 전부를 구매하려고 했으며 안 되면 할빈으로부터 장춘사이의 동청철도라도 구매하여 일본의 세력을 려순으로부터 할빈까지 확장하려 하였다.’고 했다.

     

    셋째로 일본이 한국병합에 대한 결정을 러시아에 통보하려는 것이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에서 한국을 병합할 결정을 통과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데 대해 국제적인 반대여론이 있을까 두려워 사전에 러시아에 귀뜸하여 장애를 방지하려 했다. ‘민우일보’는 일본 중앙일보의 소식을 전재하기를 이토공의 아들 이토분기치가 부친이 최후로 말하기를 ‘이번 만주에 가는 목적은 한국정책과 중국문제 때문에 간다’고 하였다. 이 보도는 일한합병이 이번 회담의 한개 내용임을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주었다.

     

    4.

     

    중국 여론은 일찍부터 안중근을 ‘의사’, ’의협’, ‘위인’ ‘영웅’으로 평가하고 존중해 왔다. 당시 의거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사후처리를 하였던 할빈 도태(道台.할빈의 중국측 최고장관) 시조기(施肇基) 회억록에는 ‘고려의 자객은 역사에 길이 빛날 고려의 의사 안중근이다’라고 씌여 있다.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가 손중산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고 제사를 써 안중근을 찬양했다.

     

    중국의 근대 민주혁명가이며 저명한 학자 장태염(章太炎)은 ‘아시아주 제일의협’이라 휘호하여 안중근의사를 높이 평가했다.

     

    당시의 저명인사 주호(周浩)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것은 조국을 위해 복수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공동의 적을 제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한국에 공이 있는 사람이면서 또한 아시아에 공이 있는 사람이며 세계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당시의 저명인사 고관오(髙冠吾)는 ‘안중근의 기적은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귀신이라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안중근은 세계의 영웅호걸이다’라고 찬사를 썼고 당시의 저명인사 한염(韩炎)은 ‘안중근은 삼한의 현인이며 세계의 영웅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민이 가장 존경하는 주은래(周恩来)총리는 ‘중일 갑오전쟁후, 중조량국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본세기초, 안중근이 하얼빈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때부터 시작되였다.’라고 역사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사는 100년전 세계가 제국주의 시대에 처하여 있을 때 벌써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시작한 항일의사이고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일찍 각국의 자주독립과 아시아의 평화사상을 주창한 세계적 위인이다.

    /서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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