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하직하신지 30년이 가까와 오지만 나의 시어머니와 어머니는 참 좋으신 분들이였음을 재삼 느끼게 된다.
중국 흑룡강성 목릉시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던 1984년 4월, 어머니를 모시던 남동생 내외가 외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72세의 어머니와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조카는 같이 갈 수 없었다. 이 사정을 아신 시어머니께서는 고맙게도 나의 친정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지내는게 어떻겠냐며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두 분이 다투기라도 하시면 어쩔가 하는 우려심이 있었지만 형제라곤 남매뿐인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친정어머니는 시어머니와 같이 한 방을 쓰시게 되었다. 두 분의 생활습관과 건강상태는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는 잠이 많아서 누우시기만 하면 잠이 들고 더위를 타고 안질은 밝은데 귀가 어두우셨다. 시어머니는 잠이 없어서 밤에도 늘 깨여 앉아 계시고 추위를 타고 귀는 밝은데 안질이 침침 하셨다. 어머니보다 2년 이상인 시어머니는 주인으로서 모든걸 이해하고 참아가면서 어머니 비위를 맞추려 무척 애를 쓰셨다.
한번은 더위를 잘 타는 어머니가 덥다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는데 그때 시어머니께서는 겉옷을 입으시고 집 밖에 있는 화장실로 나가는 척 하셨다. 한참후 방안으로 들어 오셔서 아무 내색 않고 계속 겉옷을 입고 계셨다. 그 자리에서 옷을 더 껴 입으면 나의 친정어머니가 눈치 챌가 그러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낮잠을 너무 오래 주무실 때면 시어머니가 깨우신다. 그리고 두 분은 마주 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고향 이야기, 이민 왔던 이야기. 난리 때 이야기, 애들 키우던 이야기 등 이런저런 사연들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서 두 분은 정이 점점 두터워졌다. 그 중에서도 공감하는 것은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 되어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경상북도 김천이 고향인 시어머니께서는 김천으로 가고 싶어 하셨고 함경도 삼수갑산이 고향인 어머니께서는 삼수갑산에 가고 싶다며 죽으면 화장을 해서 연기를 타고라도 고향에 가시는게 원이라고 하셨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어머니께서 이따금 엉뚱한 말씀을 하셔서 웃음보가 터질 때가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맞벌이가 유행이여서 며느리인 나는 일하다보면 저녁에 늦게 퇴근 하기가 일수였다. 때문에 남편이 식사 준비를 하고 밥 지을 때가 많았다. 사위가 지은 밥을 드시는 친정어머니께서는 미안한 마음에 나 보고 일찍 퇴근할수 없냐며 이 딸을 나무라셨다. 그때마다 시어머니께서는 부부가 같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남자도 부엌일을 해야 한다며 내 편을 들어 주시곤 하셨다.
남동생이 외지에서 자리 잡고 어머니를 지 모셔갈 때까지 (조카는 여름방학때까지 4개월간) 8개월간 나의 두 어머니께서는 사이 좋게 지내시며 병원 출입을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로부터 2년후 시어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비보를 접한 어머니께서는 그 좋은 분이 먼저 가셔서 슬프다고 눈물을 훔치시며 남동생더러 빨리 장례식에 가서 내 몫까지 애도해 달라고 부탁 하셨다.
생각만 해도 존경스런 두 어머니시다.
존경하는 두 어머니가 한 방에서 8개월동안 사이 좋게 지내셨는데 사진 한장 찍어 드리지 못한것이 너무 너무 후회 된다. 그래서 각자 가족 사진에서 뽑아 나란히 앉혀드리지만 죄송한 맘 여전히 달랠길 없다.
/김보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