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학 기숙사 생활의 한 페이지
1981년 5월 1일, 한 기숙사의 동창생 김종렬이 학교의 특별허가를 받고 결혼식을 올린다.
4월 29일 그가 연변대학(연길)에서 화룡현 비암촌에 있는 집으로 갈 때였다.
나는 한 기숙사 동창 7명 한테서 1원씩 받은 축의금 7원을 그의 손에 쥐여 주면서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돈을 받아 쥔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돈을 나한테 돌려주면서 말했다.
최형 이 돈으로 내일 아침에 화룡행 버스표를 사서 내 결혼식에 참석해 주는 것이 좋겠소.
기숙사의 다른 동창들도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했다. 돈을 돌려받은 나는 무안해 났다.
나한테 돈이 있으면 내가 버스표 값을 내면 된다. 비록 월급을 받고 대학에 다니지만 따져보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다른 동창들은 식사비 학비 기타 잡비는 국가에서 대 준다. 그런데 월급쟁인 나는 그 돈 28원을 내야 했다.
37원 월급이어서 9원 남는다. 부쳐온 돈 찾으러 연길우체국으로 갈 때 안전을 고려해 기숙사에 있는 동창들을 데리고 간다. 돈을 찾은 후 연길시 서시장에 들려 떡과 순대를 사 먹는데 4원 쓴다. 그리고 나면 5원 남는다. 소설책이 없는 나는 소설책 한권씩 사 본다. 그리고 비누, 치약, 잉크, 필기장도 사야 하니 월말이면 돈 1~2원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버스표 값을 낼 수도 없다. 그 돈을 받아 최문식한테 넘겼다. 내일 아침 일찍 버스표 7장 사 오라고 말이다.
이튿날 아침 연길시 버스터미널에 간 문식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화룡행 버스표가 매진 됐단다.
나는 축의금을 되받은 걸 후회했다. 그런데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이랴?
기숙사에서 나간 문식은 한 시간 지나 돌아왔다.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담고 입을 열었다.
차를 빌려 왔다. 종렬이네 집으로 가자.
차를 빌려 왔다고? 너 정말 재주 있다.
기숙사를 나서자 우리의 웃음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승용차가 아니라 자전거 3대가 서 있었다.
야, 이게 차라고?
자전거는 차 아니니? 중국어로 즈싱처(自行车)다. 처면 차다. 잔말 말고 가자. 뒤에 한사람씩 앉아라.
마침 한 동창은 갑자기 볼 일로 빠졌다. 3명이 자전거를 타고 뒤에 한명씩 앉아 100리 되는 화룡현 비암행 길에 올랐다.
연길시를 벗어나니 우뚝 솟은 모아산 기슭이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행인은 하나도 없고 용을 쓰며 오르는 버스와 트럭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우리는 자전거를 번갈아 밀면서 모아산 정상을 향해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산중턱에 오르기 전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조금 숨 돌린 후 계속 톺아 올랐다. 한 시간 넘게 걸려서야 정상에 올랐다.
조금 휴식한 후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이어서 자전거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룡정시를 벗어나니 배가 출출해났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인 돈 2원을 갖고 오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후회됐다. 그 돈을 갖고 왔으면 룡정시에서 대충 요기라도 할 수 있었을 건데 말이다. 호주머니에 있는 축의금 7원은 손대면 안 된다.
배고픔을 참고 전진해야 한다. 20리만 더 가면 비암촌에 이른다. 그런데 맥이 없어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우리는 자전거를 번갈아 밀면서 앞으로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둠이 내려와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앞에 불빛이 보이는 마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 불빛이다. “저게 불빛 맞지?” 누군가의 놀란 소리에 앞을 보니 과연 불빛이였다.
우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비암촌이 아니란다. 아직 2리길을 더 가야 한단다. 우리는 맥이 풀렸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이후 1시간 넘게 걸어서야 비암촌에 도착했다.
김종렬~ 김종렬~
우리가 석쉼한 소리를 지르자 우리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종렬은 맨발바람으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진종일 학수고대하던 막차에 나타나지 않은 우리가 보이자 달려와 나를 부둥켜안고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종렬의 어머니께서도 맨발바람에 뒤따라 나오셨다. 집안에 있던 마을 사람들도 나와서 반갑게 우릴 맞아주었다.
이튿날 결혼식은 성대히 치러졌다. 이 마을 결혼식에는 외지에서 온 대학생들의 참가는 처음이란다. 그것도 한명도 아니고 6명씩이나 참가했으니 이것도 결혼식 못지않은 경사였다.
결혼식 이튿날 우리 일행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낮 길에 또 평길이어서 정오쯤 모아산 정상에 이르렀다. 또 종렬의 어머니께서 싸 주신 점심밥은 침실에서 먹기로 하고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자전거는 쏜살같이 달렸다. 한참 달리는데 올라오는 버스가 나타났다. 앞에서 달리던 나는 브레이크를 잡았다. 강파른 내리막길인데다가 뒤에 한 사람 더 앉아 있으니 브레이크는 기능을 상실했다. 내 뒤에는 총각인 림금산이 앉아 있다.
나는 더 생각지 않고 자전거 손잡이를 길옆으로 틀었다. 넘어진 자전거 앞바퀴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쓰러진 채로 금산이를 돌아보았다. 그도 쓰러져 있었는데 멀쩡했다. 다행히 자전거도 멀쩡했다.
뒤를 따르던 2대의 자전거도 쓰러졌지만 모아산 산신령이 도왔는지 사람과 자전거는 모두 멀쩡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침실에 도착한 우리는 종렬의 어머니께서 싸 주신 점심거리를 풀었다. 튀김 닭 한 마리, 삶은 돼지고기 한 덩이, 순대 6개 그리고 찰떡 한 그릇이 있었다. 이처럼 좋은 음식에 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농궤 안에 있던 돈 2원을 꺼내 침실의 막내 장혁이한테 주면서 술을 사오라고 하자 모두들 환호했다.
술자리가 끝났을 땐 저녁때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모아산을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 든 모아산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요즘 들어 나이가 문제인지 나에게는 그 옛날의 추억이 더욱 삼삼히 떠오른다. 그때마다 그 맛 나는 산해진미의 맛, 그렇게 두터웠던 친구들의 우정이 더 그리워진다.
/최 영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