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있는 무순원수림유적지를 몇번이고 다녀왔지만 《말타고 꽃구경》하듯이 매번 유감스러운 점이 많았다. 7월 20일 여름방학을 맞이하면서 끝내 나혼자만의 자유시간으로 조용히 무순원수림을 또다시 답사하게 되였다.
무순 원수림은 무순시에서 동쪽으로 약 30키로메터 떨어져있는 무순현 장당향 고려영자촌의 작은 산위에 자리잡고 있다. 혼하가 동남서 3면을 에돌아 흐르고 강건너 철배산을 마주하고있는 아름다운 풍경구에 있다.
1928년 4월 장개석의 북벌군이 다시 북벌을 재개하자 장작림은 일본의 권유로 장개석과의 싸움을 피해 북경을 떠났다. 6월 3일 북경을 내주고 만주로 복귀하던 도중 6월 4일 장작림이 탄 렬차가 심양역에 들어오기 직전 황고툰부근에서 폭파되여 치명상을 입고 장작림은 사망했다. 이 사건은 관동군의 고급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와 그 일파가 만철 등 만주 현지 세력과 자주 충돌했던 장작림을 제거하고 혼란한 틈을 타 만주를 점령하고 지배하기 위해 꾸민 음모극이였다. 그후 장씨가족은 풍수를 잘 보는 사람을 파견하여 장작림의 묘지를 만들기로 하였다.
료심지역의 명산대천을 다 돌아본 결과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는바 장학량부부 및 가족들은 이곳에 묘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5월부터 시작하여 약 3년을 거쳐 15헥타르에 달하는 우방성 원성 묘지실 등 3개 부분으로 구성된 릉묘를 세웠다. 릉원의 전체건축규모가 웅위로왔고 구조가 아주 빈틈없으며 금빛찬란하였다. 또한 력대제왕릉원의 습속과 중서방의 풍격이 결합된 새로운 의미가 깃들어있다. 릉성이 거의 완공될 무렵 《9.18》사변이 일어나 제대로 안장하지 못했기에 아쉽게도 빈 릉묘로 되여버렸다. 후에는 료녕성 금현역마방이라는 편벽한 곳에 부인과 어머니와 함께 안장되였다.
현재 원수림은 성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릉원안에는 중국북방 최대의 명청석각군과 현대서예비각 등이 세워져 있다. 동북의 명성고적, 유명한 유람풍경구로 중외에 널리 알려진 원수림으로 일년사시절 중외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다.
/김 경덕